이런 책을 기다려왔다. 황현필 선생님은 재미있게 말하는 법을 아는 이야기꾼이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관계를 잘 맞춘다. 불필요한 부사는 쓰지 않는다. 수동태는 최대한 쓰지 않는다. 덜어낼 것이 더 이상 없을만큼 덜어내어 가벼운 문장으로 쓴다.' 와 같은 것들은 기본이다.) 시대순으로 사건이 나열되고 책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간다. 그때그때 제공되는 지도와 그래픽에서 그 행적이 자세히 표기되어있다. 문체는 간결한 호흡으로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지나친 찬양을 자제하도록 최대한 담백하게 쓰였다. 여러 등장인물들, 지역, 역사행사, 도구, 건축물 등의 사료와 사진, 설명이 함께 나온다. 거의 학창시절에 보았던 국사책과 역사부도에 버금간다. 그 때 보던 국사책은 흑백 책이었지만 이 책은 컬러다!
이 책의 저자가 서문에서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이순신 역사서는 이 책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 자부합니다."라고 쓰고 있듯히 정말 훌륭한 책이다.
대한민국(북한), 중국, 일본.
고대로부터 지금까지도 세 나라는 참으로 많은 연관을 가지고 살고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당나라와 왜가 함께 참전했던 동아시아 전쟁이 있었다. 그 후에 조선, 명, 왜가 참전한 동아시아 전쟁이 임진왜란(7년 조일전쟁. 임진년 발발 2년 전쟁, 남해안 지역에 30개에 가까운 왜성을 지어놓고 버티며 4년간 휴전, 정유년 다시 2년간 전쟁)이다.
임진왜란에서 한 명의 개인이 삼국의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영웅인 이순신 장군님의 일생을 추적한 책이다.
아래는 책 내용 일부를 그대로 옮겨쓰기도 하고 내 말도 섞어가면서 적은 내용이다.
이순신 장군님의 23번의 승리와 그가 걸어온 삶을 생생하게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지만 멀리서도 양 군의 속내와 전황을 볼 줄 아는 신하들이 옆에서 조언을 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결정을 어리석게 내렸던 (전쟁의 패착이 되도록, 결국 자신의 자리만 지키려고 하다가 무수한 백성들이 더 죽고 자기 자리도 위험해지는 - 임진왜란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총칼에 죽고, 병으로 죽고, 굶어죽었다) 선조의 모습도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었다.
선조 27년(1594),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서로 잡아먹고 역병까지 겹쳐 죽은 자가 이어졌다. 수구문 밖에 그 시체를 쌓으니 성보다 높았다. 승려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매장하니 이듬해에 끝났다.
이수광 [지봉유설] ー [조선잡사] 83p에서 발췌
왜군 침략 후 순식간에 나라가 멸망하게 된 상황에서 연전연승무패를 하면서 조선의 바다를 지켜낸 이순신. 그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덕분에 조선이 일본땅이 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1597년에 선조는 그런 이순신을 잡아다 하옥하고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그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 누구였어도 더 이상 그런 왕에 대한 충성을 하기는 어려웠을 거다. 이순신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망가진 몸을 이끌고 백의종군하면서 남해를 향해 걸어갔다. 여든의 어머니가 여수에서 자신을 보러 올라오다가 나룻배 위에서 기력이 다해 돌아가신다. 자신의 큰 형 둘은 이미 예전에 죽었기에 자신이 상주를 맡아야한다. 하지만 감시관은 빨리 가자고 한다. 아래는 어머니 상중에 [난중일기]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4월16일.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리고 나니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다 빠진 데다 남쪽으로 떠날 길이 또한 급해서 소리 내어 울부짖었다. 다만 빨리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4월19일. 맑다. 어머님의 영전에 인사를 올리고 울부짖었다. 어찌하리오, 어찌하리오? 천지에 나 같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일찍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 [이순신의 바다] 중에서
또한 선조는 의병장 김덕령도 잡아다가 죽였고 그 모습을 본 의병장 곽재우는 산에 들어가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정계 진출을 거부하였다고 한다.
조선 역사상 청백리의 대명사이자 최고의 정승이라고 평가되는 이원익(1547~1634)은 1595년 8월 직접 한산도를 방문했다. 그는 이순신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순신은 침착하고, 남에 대한 말을 하지 않으며, 오로지 나라 걱정이 가득했다. 항상 계획적이었고 꼼꼼한 사령관이다"
이원익은 원균 또한 직접 만나보고는 이렇게 평가했다.
"원균은 결단코 기용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원균에 대한 이야기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서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역사 교양서를 통해 다시금 접하다 보니 혈압이 자꾸 올라갔다. 나무위키의 임진왜란 참전 왜장 이시다 미쓰나리의 항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전투에 무능했는지를 설명하고자 원균을 예로 드는 대목이 나온다. 원균이 스스로 침몰시켰거나 전투에서 잃어버린 배의 수는 170~200척이며 전과는 18척 격침이라고 나온다. 자신이 10척을 잃을 때 왜군의 1척을 부순 셈이다. 이순신의 부하가 되어서도 상관의 말은 안 듣고, 이순신 옆에서 그 많은 전투를 함께 경험했음에도 전혀 학습하지 못했던 무능력자이고, 욕심은 많고 그럼에도 아주 중요한 시기에 아주 중요한 요직에 앉았다는 것은 최종 결정권자의 이목을 흐리게 만드는 능력만큼은 출중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참으로 여러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큰 고통을 안기는 암적인 능력치 분배라고 볼 수 있다. 고위 관료로 발령을 받으면 임금을 알현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순신의 경우 급히 임명되어 복무 현장으로 가는 바람에 선조와 서로 얼굴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선조와 얼굴을 마주보았던 개인적 친분이 없던 것도 선조를 불안하게 했었는가보다. 그에 반해 원균은 (선조랑 얼굴을 마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충청도 병마사로 발령받고 조정 대신들을 만나며 상당한 인맥을 쌓아갔다고 한다. 원균은 꾸준히 이순신을 비난하는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잡아들이게 만들고 자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순신에게는 조정에서 지원해준 것이 전무했으나(선박, 무기, 식량, 징병 다 자급자족함), 원균은 선조에게 육군 30만명이 내륙에서 왜군을 공격하면 자신도 수군으로 호응하겠다는 (허망한) 말을 한다. 그래서 선조는 권율의 육군 5천명을 떼어서 원균에게 합류시켜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원균은 대한민국 반만년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도저히 지기 어렵게 유리한 상황에서의 처절한 패배를 만들었다. 얼마나 멍청하면 본진 수비군도 안남기고 전군을 뿌리채 뽑아서 출정했을까. 전략과 전술도 없고, 심지어 체력 안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서 기름 넣고 가는 내연기관도 그렇게 안 다룰 듯한데 긴시간을 막무가내로 노를 계속 젓게 시킨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다. 눈에 보이면, 쫓아가 싸우라는 지시만 내릴 뿐이다. 결국 싸움다운 싸움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칠천량해전을 통해 판옥선은 124척 중 112척을, 거북선은 3척 전부를, 수군의 거의 전부를 궤멸시킨다. (124척 전부가 아닌 이유는 그나마 항명하여 빠져나간 배설의 12척 판옥선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배설은 경상우수사임에도 이순신 복귀 후 명량 대첩을 앞두고 탈영하여 왜란이 끝난 뒤 고향에서 붙잡혀 처형당했다) 그리고 건재하던 수군의 궤멸로 인해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정유재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 발발 때는 참전한 다이묘들이 조선땅을 나누어 다스릴 생각에 조선인을 철저히 학살하는 모습까지는 아니었으나, 휴전이 끝나고 일어난 정유재란에서는 조선 백성들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내고 쳐 죽이는 등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고 한다.
원균이 충청도병마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순신은 원균과 일단 멀리 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충청도로 떠난 원균의 행실은 엉망이었다. 원균에 대한 탄핵 상소가 빗발쳤다. 그런데 선조는 원균에 대한 탄핵을 적극 막아주었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하고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사용하지 마소서."
임금이 답하기를
"원균은 사람됨이 범람(평범)하지 않다. 이런 시기에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
사헌부가 원균의 탄핵을 재차 아뢰니 임금이 답하였다.
"오늘날의 장수로서는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가벼이 논계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 윤허하지 않겠다."
<선조실록 1595년 8월 15일>
240p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칠천량)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1598년 4월 2일, 사관의 논평>
293p
선조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오히려 정말 마지못해 그런다는 인상을 팍팍 풍기면서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이되, 계급도 예전보다 낮춰서 임명한다. 이순신이 일궈놓은 수군은 궤멸되었기에 임명장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자리다. 이순신은 성치 않은 몸으로 각지를 돌며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고 배설이 숨겨놓은 판옥선도 가지고 온다. 선조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 신에게는 12척이 아직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멋진 장면이 아니라 거의 항명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선조가 시키는 대로 했으면 역시나 나라는 멸망하고 조선은 왜의 땅이 되었을거다. 그리고 명량에서의 기적 같은 승리. 마지막으로 노량에서 전세계 역사상 제1차 세계대전이 될 때까지 가장 대규모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사하신다. 효종, 숙종, 정조 같은 왕들도 이순신 장군님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예전에 '불멸의 이순신'을 보았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일본인 장수가 와키자카 야스하루 였었다.(배역을 맡으신 분(배우 김명수)의 연기가 무척 좋았다.)
와키자카 집안의 전통
한산도대첩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 차례 이순신과 대결하였지만 용인전투에서처럼 용감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어떤 전투를 앞두건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와키자카는 이순신에게 패배의 쓴맛을 톡톡히 보았고 이순신에게 겸손을 배웠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돌아간 와키자카,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의 동군이 싸우던 세키가하라전투에서 그는 서군 측에 있으면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친했기에 은근히 동군 편을 들었다. 결과적으로 동군이 이기고 새롭게 들어선 에도 막부에서 와키자카는 자신의 가문을 살아남게 할 수 있었다. 이와키자카 가문은 실제로 '항상 겸손한 가문'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에도 막부 300년 동안 굉장한 대접을 받았다.
와키자카는 다른 일본 장수들과 달리, 조선 원정 후 일본에 돌아온 뒤 자신의 전공을 부풀리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한산도에서 이순신에게 패전하고 이후 10일간 미역만 먹고 목숨을 부지했던 바를 명확히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와키자카의 가문은 한산도대첩이었던 7월 8일에는 다른 음식을 삼가고 미역만 먹는 전통이 생겼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1554~1626)
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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