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중앙도서관 사서 추천 도서 목록에 있기에 보게 되었다. 저자는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역사와 경영학을 접목한 느낌이었다. 한국사에서도 깊이가 있고, 그것을 경영학의 시점으로 풀어내는 것이 독특했다. 세계적인 명저처럼 일관된 하나의 시점을 가지고 역사를 관통하는 그 무엇이 있지는 않았지만, 도현신 님이나 박영규 님의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접근이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 인정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또한 아직 먼발치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서구권 나라들이 팬데믹 사태를 통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타국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은 바이오산업, 배터리, IT, 전자, 문화 등등 여러 분야에서 강국일 것이다. 이러한 자긍심이 생기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가며 성숙해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제가 그렇게 깎아내렸던) 조선에 대해서도 보는 시각이 달라져가는 것 같다. 조선의 역사를 돌아보며 공들인 제도들(예를 들어 왕세자 교육제도ー[왕가의 전인적 공부법] -도현신-), 현대와 다름없이 능력 있는 인물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정 많은 사람들이 살았고, 이권이 있으면 다투고, 제도가 허술하면 그 빈틈을 이용하고, 뜻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모여서 한목소리를 냈다는 걸 깨닫는다. 특히나 인사를 운용하는 부분을 보면 [시스템 에러] -롭 라이히 외 2인-에서 논하는, 근본적인 목적을 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삼은 기준을 전부 삼아 매달리게 되는 문제를 똑같이 고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려 600년 전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조선의 나라 경영 시스템은 생각보다 철저했다는 생각이다. 무지막지한 공부 끝에 엄청난 난도의 주관식 논술형 시험을 크나큰 경쟁률을 뚫고 붙을 정도의 지력을 갈고닦은 사람들이 위정자 역할을 한다. 다만 시험에 도덕적 자질을 가리는 수단이 없으므로 시험 성적과 사람의 인성은 별개가 되어버린다.
전분육등법과 연분구등법의 탄생 과정, 신문고 제도의 악용, 호패법의 폐지기간이 더 길었음, 서원의 난립과 철폐, 환국 정치에 목숨이 사라지는 불안한 관료 등에 대해서 잘 몰랐던 부분까지 알 수 있었다. 조선의 정치와 행정, 인사에 있어서 좀 더 깊은 속내를 알게 되었고, 더불어 현시대에 반면교사와 벤치마킹을 삼을 수 있는 사례들도 접할 수 있었다.
기록의 나라 조선. 역사를 배우려는 이유는 과거의 사례를 참고하여 더 나은 방안을 찾으려는 까닭이다. 조선이란 나라에서 조세와 관련한 정책에 관해서 연구하고 시행착오하고 많은 이들이 논리와 근거로 대결하고 서로 토론하고 표결했던 사안들을 포함해서, 방대한 기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크나큰 보물창고가 아닐까.
총 세 개의 부로 나뉘어있는 20개의 꼭지에서 각각의 부 속에 모두 한 번씩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갔으며, 총 6개의 꼭지에서 등장한 임금은 세종대왕님뿐이다. 필벌이 약했다와 신하들의 세대교체를 이루지 못했다는 반면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벤치마킹 대상이다.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체계를 세웠고, 조세제도를 무려 15년간 끈기를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해나갔으며, [정관정요] -오긍-의 위징과 당 태종처럼 세종대왕님은 항상 소수의견,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게 하여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덧붙여서 태종과 세종의 관계는 후계 리더를 위한 이상적이었던 승계 과정이었던 반면에, 숙종이 만든 환국 정치가 후대 임금들에게 얼마나 큰 폐단을 떠넘겼는지도 알았다.
끝으로 책의 내용 일부를 발췌해서 옮겨적는다.
태종에 따르면 충녕대군은 학문에 힘쓰며 자신을 성장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다. 국정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갖췄으며 외교력도 겸비하고 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돈독히 하고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키며 각종 제도와 문물을 완비해야 하는 과제를 앞둔 시점에서 충녕대군의 이러한 자질이 조선의 임금이 되기에 보다 어울린다고 판단한 것이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든 점도 주목된다. 이는 차차기 왕위 승계자까지 준비되어 있다는 뜻으로 국가의 기틀이 공고해지리라는 것도 고려했다는 의미다.
195p
이 밖에도 유정현, 최윤덕, 이직, 맹사성 등 세종 시대의 재상들은 대부분 세종의 결정에 자주 반대하고, 세종과 다른 의견을 냈던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던 것은 허조(許關)인데 그가 소수 의견을 내는 것은 일상이었다. 백성에게 법전을 쉽게 풀어서 알려 주는 문제, 수령의 임기를 늘리는 문제, 신문고를 칠 수 있는 조건을 완화하는 문제, 백성이 고을 수령을 고발하면 이를 어떻게 처리할지의 문제, 과거 시험을 보완하는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그는 세종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다수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실록에 보면 다른 신하들이 모두 찬성할 때조차 '허조만 홀로 아뢰며' 반론을 제기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세종은 "허조는 고집불통이다."라고 불평하면서도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6년간이나 인사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로 중용했다. 정승이 되었을 때도 상당 기간 이조 판서를 겸임하게 한다. 인재를 정밀하게 살피고 편견을 예방하며, 인사 결정을 심사숙고하기 위해서 허조를 이른바 '악마의 변호인(devil's advocate)'으로 삼은 것이다. 이처럼 CEO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 최고 인사 책임자(CHO)를 맡기는 것은 오늘날의 기업에서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요컨대 세종은 반대자를 중용하여 시너지를 냈다. 그는 임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임금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신하가 아니라, 임금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내는 신하를 선호했다. 세종도 사람인 이상 전자가 끌렸을 테지만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후자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신하의 반대를 통해서 자신의 결정에 잘못된 점이 없는지 반성하고 정책의 문제점을 점검해 갔다.
물론 이와 같은 반대자는 '무조건적인 반대자'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반대자' 여야 한다. 기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는 치열하게 반대하더라도 일단 결정이 나면 일사불란하게 힘을 합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임금과 신하, 리더와 참모 사이에 굳건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허조는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소신이 반대하였지만 끝내 전하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신의 의견을 수용하여 이만큼 고쳐 주셨으니 이제는 시행해도 문제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도 “성상(聖上)의 은총을 만나 간언을 올리면 실천해 주셨고 의견을 말하면 경청해 주시었으니, 내 이제 죽지만 여한이 없다."라고 했다. 자신이 반대 의견을 내면 임금이 경청하며 반영해 주었고, 또 언제나 그렇게 해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설령 자신의 의사와 다른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온 힘을 다해 헌신한 것이다. 이는 다른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162~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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